2022년 1월 17일 월요일

노력은 배신할 수도 있다 ?

우리가 젊은 친구나 학생들에게 자주하는 말이, 이른바 ‘어떤 노력도 결국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름의 삶을 경험한 바에 따르자면 노력은 언제나 배신한다. 그 이유는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이다. 이전 포스팅에서 열심히 하는 것과 잘 하는 것은 다르다고 적었다. 이것은 입시나 취업은 물론 직장 생활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 직원은 없다. 최소한 그렇게 보이도록 열심히 노력한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노력과 다르다. 그럼에도 노력해야 하는 혹은 노력하는 척 하는 이유는 결과와 무관하게 노력하지 않는다는 자체로 상사로부터 욕 먹을 가능성을 줄이기 위함이다. 업무나 프로젝트가 기대한 바대로 되지 않았을 때 한번 제대로 욕 먹으면 될 것을 괜히 여유 부리다간 두고두고 욕 먹게 되기 때문이다. 농담 같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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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 배신하는 이유는 무능이나 무지의 절대 영역이 단순히 열심히 노력하는 것으로 보완되는 부분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굳이 한 인간의 지적 능력을 비하할 생각이나 이유는 없지만, 경쟁이라는 상황 특히 지적 학습을 필요로 하는 영역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정량적으로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해 노력이라는-상대가 방심한 틈을 노린-대응을 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목표한 결과를 얻기 위해 주어진 상황에 처해진 자신의 역량을 정확하게 파악 혹은 인정을 하지 않으면 시간 낭비, 비용 낭비 그리고 체력 낭비가 되고 나아가 정신적 피해까지 초래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의 젊은 친구들은 대부분 자기 주변에 만나는 이른바 직간접적 경쟁 대상에 비해 자신의 우월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자신감이 아닌-자만심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실제 그것은 자만심이라는 보다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스스로 감추기 위한 자위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학습의 자세나 노력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주변 특히 부모님이나 상사로 부터 압박에 시달리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의미없는 노력의 자체가 습관이 된다. 마치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하면 자신은 물론 주변으로부터 무언가를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으로 비춰지도록 기능화되었다는 것이다.

업무에서는 이런 경우 상사나 선임이-굳이 실제 옆에 두고 상황을 관리하지 않더라도-다양한 관리 체계를 통하여 실제적 효용성있는 대응을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관리 체계에 갇힌 이들의 답답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직장인이라면 어차피 이런 체계에 갇혀 있으니 전체적 업무 진행을 위한 적응할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 적응의 범위에서 각자 나름의 요령을 피우게 되고 직장 상사 역시 같은 경험을 한 바 마찬가지로 유연하게 관리 수준을 조절하게 된다. 간혹 그렇지 못한 관리자 특히 최고경영자 혹은 소유자의 눈에 들기 위해 직장인의 자세를 망각한 생각을 가진 경우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공부하는 학생 신분이나 진학이나 취업 등을 따로 준비하는 경우는 외부에서 이러한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적 행위를 관리할 체계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사람 간의 직접적 대응이라면 역효과를 발생시킬 위험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당사자들도 잘 알다보니 이른바 학원 등 나름의 관리 체계 속으로 들어가 수 많은 경쟁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목표한 바를 준비한다. 물론 확률적으로 보자면 쉽지 않는 상황이겠지만 다른 대안을 찾기란 힘들 것이다.

대부분의 인간은 고립 즉 외로움을 견디기 쉽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찾은 경쟁에서의 승리라는 환상을 주는 관리 체계에서의 일상은 시간이 지날 수록 불안을 야기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으로 나가게 되면 상대적 비교에 따른 비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다시금 관리 체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 체계의 편안함에 빠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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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의외로 주변에게 적지 않게 볼 수 있는 사례이다. 그럼에도 자신이 노력한 바는 결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고 항변하면서 위로해주고 지지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노력이 이미 배신하고 있음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다만 인정하지 못할 뿐이다.

그렇다면 노력으로부터 배신 당하지 않으려면 어떤 대응해야 할 것인가 ? 가장 단순한 것은 노력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일부 천재적 능력을 가진 경우에 한정된 것이니 굳이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범인(凡人)은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전 포스팅에서처럼 노력의 대상이 노력하는 역량이 도달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야 한다. 더 일상적 표현으로 적자면 자신의 수준을 알고 그 수준에 걸맞거나 추가로 노력한 만큼의 요행이 가미된 수준에서 승부해야 한다. 물론 한 개인에 있어 이러한 자신에 대한 인정은 적지 않게 힘든 고백일 수 있다. 그렇더라도 진정한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정직한 댓가라는 측면에서 좀더 자신에게 냉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어여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 가족이나 주변 모두가 고생이다. 지금 이 순간 그렇다면 어쩌면 본전 생각하지 말고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인 주변 집단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스스로를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자제력이 없다면 집단적 학습 체계는 노력을 빙자하여 불안에 대한 안심에 대한 댓가로 먹고 사는 자본주의의 이익 체계을 자신을 가두는 것이다. 만일 자신이 진정 노력했다면 그 결과는 1~2년 사이에 결과로 알 수 있다. 그 이상은 상대적으로 매우 힘들고 어려우며 더욱이 지속하기 조차 쉽지 않다. 한 번의 실패를 준비 부족으로 돌리고, 두 번의 실패를 역량 부족으로 돌린다면 결국 그 다음의 자신의 노력 부족을 탓하게 될 지 모른다. 자신의 노력에 스스로 배신당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노력에 배신 당하지 않았다면-아마도-현실적 목표를 정하고 합리적 방향으로 간 덕분일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항상 기대한 목표에 도달할 수는 없다. 경쟁이라는 것은 피차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경쟁에서 승리한 이를 인정하는 것도 필요하다. 강조하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도 공정했고 노력했다. 부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초라한 변명을 할 필요는 없다. 이제 다른 길로 갈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자신의 노력을 폄하하지 말기 바란다.

2022년 1월 14일 금요일

GTD 사용자의 물건 정리 규칙 ?

정리란 무엇인가? 단순하게 보자면 현재 필요성을 기준으로 향후 활용성을 평가하여 상대적으로 효용성 없는 대상을 버리는 것이다. 물리적 대상이라면 공간적 제약이 우선적으로 검토될 것이며, 디지털 형태 파일이라면 관리 효율성을 우선 검토해야 될 것이다. 물론 정리의 효과는 물리적 대상이 확실한 체감 성능을 제공한다. 더불어 정리 자체의 과정도 효과가 좋다. 디지털 파일에 대해서는 생각할 사안이 많으니-자주 언급한 사안이기도 하고-뒤에 다시 생각해보기로 할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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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대상이든 정리가 되면 시각적으로 확연한 효과를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십년간의 자의적 타의적 정리 과정을 거친 최종적 결과를 한다미로 적자면, 이 세상에 필요없는 물건은 없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불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쓰임새가 발생하거나 혹은 몰랐거나 잊었던 활용성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그 사이의 긴 시간과 보관 비용으로 볼때 현실적 효용성에 비춰 버리지 않고 보관하는 것과 새로 구입하거나 마련하여 대응하는 것의 차이는 비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짧게는 수년 길게는 십수년이 지난 후, 정리되고 버려진 물건의 필요성이 요구될 때이다. 특히 대상 물건의 기능성을 대체하기 위한 상당한 비용이 초래되거나 심지어 대응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었다. 실제적으로 그 물건이 차지하는 공간적 요구나 관리 비용을 돌이켜 보면 굳이 정리 대상이 되었어야 한다고 생각까지 든다면 너무 비약적인지는 몰라도 정리가 주는 효용성에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몇 번의 경우는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초래되기도 하면서 후회한 경우도 있었다.

결국 정리한 것을 단순하게 버리는 것으로 한정할 수 없다. 적절한 보관 역시 정리의 방법이다. 하지만 보관에는 공간적 비용은 물론 관리적 비용이 발생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운좋게 여유있는 창고가 있긴 하지만 일상 공간과는 제법 떨어진 곳이라 날 잡아 시간 내어 물건을 옮기고 해야 하니 다소 부담이 되기도 하지만, 버리는 것 보다는 창고에 보관하는 방법을 선택하고 있다. 사실 창고에 보관하더라도 별도의 관리 체계가 없다면 버리지 않았다 뿐이지 이후 필요가 있을 때 제대로 기억하고 활용하기 어렵다는 점에서는 결과적으로 버리는 것이라 비슷한 상황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역시나 이 세상에 나와 인연은 맺은 모든 유무형의 물건 가운데 크든 작은 나름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는 것 같다. 세상 만물, 문의한 것은 없다. 현명한 생각이 모르지만 반백년 넘은 시간을 흘려 보낸 다음에 이런 생각이 드는 것에 쓴 웃음이 지어지기도 한다.

물론 정리함에 있어 보관과 버림 가운데 선택을 해야 한다면 당연히 버려야 한다. 돌이켜 아쉬운 경우는 억지로 정리의 대상으로 만들어 고민하지 않았나 싶다. 즉 대상을 보고 느낀다면 굳이 정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지만 정리라는 커다른 주제에 묻혀 함께 처리된 경우가 많다. 특히나 상당한 공간을 차지하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일상의 사용 빈도가 지극히 낮은 경우라면 일시적으로 정리 상황에 몰리면 제대로 된 가치나 의미를 판단하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정리라는 과정이 일상의 정기적 과정으로 관리되지 않고, 프로젝트 수준의 이벤트로 진행하다가 그런 문제를 겪게 될 수 있다.

우리는 내 손이 닿은 물건이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진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때문에 그 효용성에 대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쉽게 버리지 못한다. 하지만 그러한 물건들이 제대로 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일상의 다른 물건과 섞여 있다면 어느 순간 정리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나 나름의 의미든 가치든 조금이라도 평가될 수 있는 사안이 있다면 별도의 위치에 자리하든 목록으로 구성된 나름의 관리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물건에 대한 자신의 마음, 정성적 판단을 믿지 말아야 한다. 인간의 마음은 언제나 추억의 대상에 대해 그때 기분에 따라 다양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 때문에 정량적 판단이 없다면 쉽게 정리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2022년 1월 7일 금요일

열심히 하는 것 vs. 잘 하는 것 ?

젊은 친구들의 고민과 고뇌에 대한 포스팅 시작에서 잠시 언급한 사안 가장 안타까움 사안이 하나있다. 그것은 열심히 노력한 젊은 친구들의 좌절에 대한 항변으로, 자신은 오랫동안 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고 일 했음에도 기대한 그리고 예상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이다. 세상의 공정과 평등을 탓하며 가장 크게 좌절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 주장에 대한 가장 일반적이면서도 기성 세대 다운 반대 질문을 보자면, 그렇게 오랫동안 공부하고 준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그렇다는 것은-비록 열심히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결국 당사자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사실 결과에 대한 책임의 가장 큰 부분이 당사자인 것은 분명하다. 경쟁 조건이 아무리 좋더라도 경쟁이라는 상황에서는 실패하는 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

그렇더라도 거듭 강조하지만 진학, 취업 그리고 시험에 실패한 많은 젊은 친구들이 열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솔직히 그토록 열심히 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앞의 두 주장 내지는 사실에 비춰 보자면, 결국 열심히 한다는 자체로서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경쟁이라는 것은 상대적 평가일 수 밖에 없다보니, 결국 정성적 평가 보다는 정량적 평가가 우선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경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그 경쟁의 평가 기준은 인정하는 지는 의문이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된 혹은 불합리한 판단으로 인한 좌절의 근거를 공정하지 못한 환경 탓으로 돌리며 자위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본다.

열심히 한다는 것이 진학이나 취업 시험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채용 면접 등을 볼때면 모든 지원자들이 열심히 하겠다고 주장하며, 야근이나 주말 근무는 물론 잦은 출장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한다. 과연 자신들이 말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알고 하는 지 의문이다. 결국 열심히 한다는 자체로 보자면 모두가 열심히 하지 않는 경우는 없을 지 모른다. 즉 열심히 한다는 자체가 매우 주관적이며 정성적이다. 열심히 하는 것이 기준이라면 모두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은 누구가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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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열심히 했다는 사실을 자신 혹은 주변에 증명하기 위해서는 과정에 쏟아 부은 시간, 비용 그리고 관련된 크고 작은 인증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 역시 모두가 동일하게 투자하고 소유했다면 결국 분별력이 있는 평가 요소가 되지 못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열심히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또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약하자면 자기 최면이나 현실 도피라고 오해받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주장을 한다고 노력을 할 필요가 없다거나 혹은 노력하지 말하고 하는 것은 아니다. 열심히 하는 것은 분명 필요한 자세이다. 천재이거나 소수의 운좋은 이가 아니라면 열심히 한다는 자체는 논할 필요가 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노력의 방향과 방법은 노력 자체와는 다른 사안이다. 취업을 준비하는 많은 이들을 보면 자신이 원하는 혹은 지향하는 분야나 기업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 조차 없는 상태에서 이른바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약간의 수고와 시간만으로 인터넷에서 해당 기업이나 관련 분야의 전망이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음에도 그런 정보를 관리하는 이를 보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그런 정보는 주변에서 듣거나 근거없는 인터넷의 소문으로 파악하는 경우가 더욱 일반적이다. 스스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경우도 선택의 폭이 매우 제한적이다. 즉 검색 대상의 접근성이 매우 한정적이다. 모두가 같은 사이트를 보고 같은 내용을 준비하는 겪이다. 21세기 스마트 인터넷 시대의 역설적 모습이지 않나 싶다.

결국 엻심히 노력하는 것과 함께 명확한 목표 대상 역시 매우 주요하다. 그리고 따로 언급하겠지만 노력 대상을 통하여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 역시 주요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그것은 대학 수학 과정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를 전공 관련 여러 과목을 학습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목표 나아가 목적에 대해 자신이 충분히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러한 대상이 주변이나 타인에 의해 설정되고 무작정 이끌려 가는 모습을 많이 본다. 또한 그러한 문제를 인식하고도 변화의 두려움과 불안으로 헤어나오지 못해 망설이는 경우 역시 많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당장 자신의 수립한 목표를 위한 노력과 그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자신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어느 순간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너무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말 자신이 수립한 사안이라면 자신이 충분히 더 옳은 방향으로 수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이의 정량적 투자에 대한 아쉬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해 방황하게 되고, 악순환의 늪에 빠질 수 있다.

분명 지금까지 노력한 내용은 그 자체로서 나름의 가치있다. 그럼에도 그 노력과 성과를 과감하게 정리해야할 때도 있다. 학습에서 가장 비효율적인 것은 스스로의 안정을 위한 불필요한 반복이다.

다시 열심히 하는 것 주제로 돌아가 스스로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을 어떻게 규정하고 또 평가할 수 있을까. 학습에 투자한 시간과 비용 그리고 앞에 쌓인 교재들로서 자평할 수도 있지만, 기대한 결과가 얻어지기 전까지 실제적 위안은 될 수 없다. 그 허무함을 위해 또 다른 학습과 체험에 빠지기도 한다. 결국 열심히 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규정되기 힘들며 평가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현재의 불안에 빠진 젊은 친구들에게 필요한 것은 열심히 하는 것은 물론 잘 하는 것이다. 잘한다는 것은 열심히 하는 것에 비해 좀더 정량적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다. 즉 크든 작은 결과로서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한다는 것은 어떻게 평가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열심히 한다는 표현만큼이나 규정하기 어렵다. 반면 잘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쉽게 판단하고 평가가 가능하다. 이를 통하여 목표에 도달하는 과정이 잘 진행되고 있는 지를 평가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면 그 평가가 어려운 것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 실행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자신이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잘 하는 있다는 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는 노력의 행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 한다. 이 질문은 정답과 오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답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질문은 구체적이어야 하고 답은 간결해야 한다. 이러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과 학습의 목표가 명확해야 한다. 어떤 경우든 마찬가지이다. 내가 GTD 스타일의 업무 처리 방식을 선호하기 이유가 그런 점에서 상대적으로 효용성이 높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의 하나는 반복을 하지 않거나 최소화하는 것이다. 책을 읽든 문제를 풀든 개인적 취미나 취향의 영역이 아닌 업무적 혹은 학습적 사안에 대해서는 반복을 가능한 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물론 많은 경우 반복을 통하여 학습 내용이 보다 명확하게 이해되거나 자리 잡을 수 있다. 이런 경우의 반복은 학습 효율을 위한 최적화의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단순한 반복과는 구별된다. 예로 한 권을 책을 읽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다시 읽는 경우와 처음부터 책을 다시 읽는 경우는 구별되어야 한다. 당연히 이것 역시 쉽지 않다. 뭔가를 시작할 때 단호한 마음과 현실적 계획이 반드시 확보되어야 한다. 그리고 계속 정기적으로 확인해야 한다.

하지만 언급한 모든 사안들 역시 목표와 목적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다는 사상누각과 같다. 목표와 목적이란 단어 자체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 친구들은 물론 일상의 쫓기는 많은 이들이 목표가 불명확하거나 목적은 생각해 보지도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면 삶이나 학습 등의 목표가 없다고,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묻는 이들도 많다. 이미 삶의 상당한 시간을 보낸 이들도 그렇지만 이제 갓 젊은 시기로 접어든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처음 마주하는 경우인 이들도 적지 않다.

목표가 없는 것은 목표를 한번도 제대로 그리고 스스로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한 그 목표에 대한 나름의 정확한 선택과 평가를 위한 정보를 충분히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면 대부분 그런 기회를 가지지 못했고 또한 주변에서 그러한 조언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언제나 기회는 주어졌다. 의무 교육 과정의 시기를 제쳐두더라도 대학 생활의 시기가 그러한 준비를 위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비록 특별하게 주어진 기회가 아니더라도 혹은 주변에서 조언할 이가 없더라도 조금만 의식이 있다면 스스로 그런 시간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의식하지 못했다면 주변의 문제가 없지는 않겠지만 역시나 본인의 책임 역시 크다.

이 어려운 문제는 뒤에 따로 언급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열심히 하든 잘 하든 그리고 무엇을 하든 꾸준함과 냉정함을 유지해주는 기반이 된다. 그러니 우선 지금이 힘들다면 그리고 무언가 제대로 결과가 나오지 않은 것이 고민이고 불만이며 나아가 세상을 탓하고 있다면, 열심히 했음에 대한 댓가가 아닌 제대로 그리고 잘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댓가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긴 노력의 시간 동안 위기의 순간은 계속 반복적으로 다가온다. 그럴 때마다 열심히 하고 있음을 스스로에게 묻고 답하는 자책을 하지 않기를 바란다. 모두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다고 본다. 다만 좀더 잘 하기 위해 현재에서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모두가 열심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2022년 1월 3일 월요일

21세기를 시작한 젊은 친구들에게..

2022년, 새해가 오면서 세상은 또 어떻게 변할 지 모르겠다. 이미 반 백년은 넘은 내 삶은 큰 변화가 없겠지만 내 뒤를 걸어 올 수 많은 젊은 친구들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내부, 외부의 변화에 따라 바뀌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선택과 무관하게 그들의 삶이 평화롭고 의미 있기를 기원한다.

평생 동안 한 발을 최첨단 산업 분야에 걸치고 있는 입장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빠르게 변하는 세상 못지 않게 오늘날 젊은 친구들, 또는 새로운 세대의 인식 역시 이전과는 크게 달라졌음을 인식한다. 사실 대한민국 역시 큰 틀에서 세계의 수 많은 나라가 거쳐갔듯 선진국으로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답습할 수 밖에 없다. 우리만 겪은 일은 아니다. 다만 그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한국적이라는 사실은 크든 작든 더 나은 삶을 제공하지 않을까 기대한다.

다른 한 발을 오랫동안 학생 교육과 관련된 분야에 직간접적으로 걸쳐 있는 입장에서 21세기의 젊은 친구들은 과거 시대의-오늘날의 늙은 친구인-젊은 친구들과는 많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자신 즉 개인 삶에 대한 평가에서 너무나 폐쇄적이면서도 피해 의식이 강하다. 특히 젊은 남성 친구들에게서 상대적으로 이러한 현상이 두드러져 보인다. 물론 일반화할 수 없는 사실이며, 만일 조금이라도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원인에 대한 내 판단은 전혀 과학적이지도 논리적이도 않다. 그저 같은 세대의 젊은 친구들을 한 발자국 떨어져 바라봐 온 나름의 느낌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세상에 불만이 참 많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것이 불만이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불만이다. 물론 일상에서 그 불만을 쉽게 드러나거나 터져 나오진 않는다. 그런 수준의 자의적 결단성을 갖고 있지는 못한 것 같다.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 어떤 이는 꼰대스러운 표현으로 적자면 ‘안방퉁소’나 ‘방구석여포’라고 웃어 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위험성은 특히 자신보다 낮은 평가의 대상이라고 자의적으로 판단된 대상에서 대해 잔인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대상을 특정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덕분에 실제 현상은 아주 사소할 수도 있지만, 가끔씩 심각해지기도 한다. 더하여 한 개인의 범주에서 끝날 수도 있지만 집단적으로 표면화되기도 한다.

물론 인류 역사에서 젊은 세대가 구 세대의 눈에 걱정어린 존재로 비치지 않았던 적이 없다. 그런 점에서 이런 시각도-젊잖은 표현으로서-어른으로서 당연한 것이다라 할 수 있다. 항상 이런 시각은 젊은 세대에게 불만 가득한 비아냥의 대상이긴 했다.

비슷한 예로 일반적 연령에 따른 정치적 성향을 논할 때, 대개 6070대는 당연히 보수화된 세대라고 하지만 돌이켜 보면 한 세대 전에는 가장 진보적인 세대였다. 만일 오늘날의 2030대의 상당수도 역시 어떤 식으로든 정치사회적 성향이 변할 것이다. 나 스스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경우 20대는 꽤나 보수적으로 성향으로 주변의 질타를 받았다. 그런 시기를 보내고 30대에 이르러서는 그 이상의 진보적 성향으로 바뀌었다. 그 이유나 원인은 정확하게 기억나질 않는다. 굳이 돌이켜 볼만한 사안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까지 생각했던 젊은 그리고 미래 세대에 대한 나만의 걱정 어린 시각에 대한 나름의 생각 나아가서는 평가를 적어보고자 한다. 주변에서 접하는 수 많은 젊은 고민과 불만을 듣고만 있기란 한발 앞선 세대로서 불편하다. 물론 나의 생각이 고민에 쌓인 불만스러운 젊은 친구들을-비록 그렇게 읽힐지더라도-비난하거나 또는 조롱하기 위한 마음은 전혀 없다. 오직 안타까움만이 가득한 심정이다. 이른바 한 세대라는 30년 정도의 시간은 너무도 짧으며 그러한 시간을 보낸 이들에게 남은 시간은 더욱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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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길게 혹은 짧게 적게될 포스팅에 대한 하나의 결론을 미리 적자면, 노력 과정의 가치와 그 결과의 가치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과정을 생략하고 결과가 주어진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마찬가지로 과정이 부실하거나 불명확하다면 기대한 결과를 예상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노력에 지친 많은 젊은 친구들이 자신을 채용만 해준다면 일을 잘할 것이다 혹은 가게만 차려진다면 멋진 사업을 영위할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바램이지 정확한 예측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내가 주장하는 그들이 결코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진학이나 취업을 준비하는 많은 젊은 친구들이 충분히 아니 그 이상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 이들에게 내가 전해주고자 하는 하나의 사안은 노력의 수준이나 정도가 아닌, 방향과 인식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목표가 불분명하거나 혹은 묵표가 없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은 노력의 가치와 무관하다. 또한 목적 없는 목표는 아무리 빨리 손쉽게 도달하든, 반대로 오랜 시간에 걸쳐 어렵게 도착하든 기대한 가치와 의미를 찾기 힘들다. 예로 많은 이들의 진학이나 취업을 목표로 하지만, 실제로 목표한 학교나 기업에 들어간 직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노력의 가치와 무관하게 떠난다는 사실을 알게되면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목표에 도달하거나 결과를 성취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배부른 소리로 들릴 지 모르나, 한 개인의 삶에서는 심각한 미련과 후회를 남길 수 있다. 젊든 혹은 나이가 들었든 주어진 시간 그리고 남은 시간의 길고 짧음을 비교하는 것 자체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그나마 허비하는 일이다.

얼마나 자주 또는 길게 아마도 정작 걱정하는 당사자들에겐 쓸 때 없을 글을 적을 지 모르겠지만, 이 땅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친구들에게 대한 안타까움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져 가는 것 같다. 앞선 세대가 뒤 따르는 세대를 걱정하지 않는 심지어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세상이 되거나 반대로 미래의 세대가 구 세대를 경쟁 나아가 타도의 대상으로 보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도 없지 않다.